제퍼슨의 공화주의적 정치 사상은 17세기에 영국 작가들이 창당한 국가당의 이념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개인권을 양도할 수 없다고 역설한 존 로크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다. 또한 역사학자들은 제퍼슨과 동시대 사람인 장-자크 루소도 제퍼슨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58] 그는 미국 은행 설립에 강하게 반대하고 자신의 의견을 존 테일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나는 국립 은행 설립이 상비군 설립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자네의 의견을 존중하고 또 그렇다 생각하네. 그리고 국립 은행 설립으로 야기된 이러한 국고 낭비를 모두 우리의 후손들이 다른 나라에게서 빌린 차환으로 갚아야 할 것이고 후손들에게 희망도 없는 가짜 미래를 물려주는 것일세. [59][60] 그러나 매디슨과 의회는 미영 전쟁 당시 경제 불황에 빠진 이유가 국립 은행이 설립되지 않았다 하여 1816년 제퍼슨의 충고를 무시하고 헨리 클레이의 주도로 미국 제2 은행을 세운다.
1790년대 그는 해밀턴과 존 애덤스가 영국의 군주제를 도입하여 공화제를 없애버리려 한다고 여러 번 경고하였다. 또한 미영 전쟁을 지지하여 미국이 영국군을 몰아내고 영국이 지배하던 캐나다를 압박하여 캐나다까지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제퍼슨이 생각한 미국의 공화주의 이상은 자유 농민이 자신들의 뜻에 따라 다스리는 농업 국가로의 발전이었다. 제퍼슨이 이러한 사상은 상업과 공업을 중시한 알렉산더 해밀턴과 크게 비교되어, 워싱턴 행정부에서 같이 장관으로 일할 때, 많은 마찰을 일으켰다. 제퍼슨은 특이하고 예외적인 것에 큰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여 후세의 미국인들은 그를 “미국 경험주의의 아버지”라고 이름붙였다. 특히 제퍼슨은 아직 인구가 적지만 단결된 미국이 산업화되었으나 각 민족으로 분열된 유럽에서 발생한 후유증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하였다.
[63] 제퍼슨은 인간이 다른 사람과 좋은지 나쁜지 구별할 수 있는 타고난 도덕성과 스스로 자신을 제한할 수 있는 선천적인 자연권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또한 도덕성이 무정부주의적 사회를 움직여 오로지 사람의 도덕성만 있어도 정부가 필요없다 하였으나, 그에 대하여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하였다. 제퍼슨은 여러 번 부족 안에서 스스로 다스리는 아메리칸 원주민의 생활과 제도를 극찬하였다. [64] 또한 이러한 이유로, 일부 학자들은 제퍼슨을 보고 감상적, 철학적 무정부주의자라고도 부른다. [65] 제퍼슨은 케링턴 대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정부 없이 사는 인디언들이 엄격하고 막강한 정부 치하의 유럽인들보다 행복지수가 높다고 설명하였다.
“ 해밀턴의 추종자들은 왕관, 주교관을 쓰는 군주제를 갈망하고, 이것들을 쓰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이다. [21][22] ” 또한 해밀턴은 영국을 국가 정치의 모범으로 삼아야한다 했고, 제퍼슨은 프랑스를 정치의 모범으로 삼아야한다 했을 만큼 이들 둘의 정치적 사상과 견해는 달랐다. 제퍼슨은 제임스 매디슨과 함께 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총재가 되어 당을 이끌어나갔다. 제퍼슨은 매디슨, 선거 전략가인 존 J. 베클리와 같이 일하며 연방주의자들에게 맞서기 위해 국가적인 민주공화당의 세력과 통신망을 갖추려 하였다. 제퍼슨은 1793년에 영국과 프랑스가 전왕인 루이 16세의 처형을 빌미로 전쟁을 벌였을 때, 프랑스를 강력히 지지하였다.
토머스 제퍼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미국의 제3대 대통령 임기 1801년 3월 4일~1809년 3월 3일 부통령 에런 버조지 클린턴 전임: 존 애덤스(제2대)후임: 제임스 매디슨(제4대) 미국의 제2대 부통령 1797년 3월 4일~1801년 3월 3일 대통령 존 애덤스 전임: 존 애덤스(제1대)후임: 에런 버(제3대) 미국의 제1대 국무장관 1789년 9월 26일~1793년 12월 31일 조지 워싱턴 후임: 에드먼드 랜돌프(제2대) 버지니아주의 제2대 주지사 1779년 6월 1일~1781년 6월 3일 전임: 패트릭 헨리(제1대)후임: 윌리엄 플레밍(제3대) 신상정보 출생일 1743년 4월 13일 출생지 대영 제국 버지니아 식민지 구치랜드 카운티 사망일 1826년 7월 4일(83세) 사망지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 정당 민주공화당 배우자 마사 웨일스 스켈턴 제퍼슨 자녀 마사, 제인 랜돌프, 메리 웨일스, 루시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 종교 이신론[1] 서명 토머스 제퍼슨(영어: Thomas Jefferson, 1743년 4월 13일 ~ 1826년 7월 4일)[2]은 미국의 정치인으로 3번째 미국 대통령(재임 1801년 ~ 1809년)이자 미국 독립 선언서의 기초자이다(1776년). 제퍼슨은 영향력 있는 건국의 아버지의 일원이었고, 미국 공화주의의 이상을 추구함으로써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대통령 재임 기간 중 그의 업적은 루이지애나 매입[3]과 루이스와 클라크의 서부 원정, 지중해 해적 소탕 등이며 소수의견의 존중, 종교·언론·출판 자유의 확립 등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노예 무역 제재는 말 그대로 노예 무역만을 금지한 것이었을 뿐, 모든 노예 제도마저 폐지시키지는 못하였다. 제퍼슨의 대외 정책[편집] 루이지애나 매입[편집] 첫 번째 취임사에서 제퍼슨은 광활한 루이지애나 영토를 미국의 세력권 안에 집어넣으려는 자신의 비전을 피력하였다. [35] 당시 그가 대통령으로 취임할 무렵, 루이지애나는 파리 조약(1763)에 따라 스페인이 영유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제1통령에 올라 프랑스 정권을 장악한 나폴레옹이 1800년 10월에는 스페인과 비밀리에 산일데폰소 조약을 체결하여 루이지애나의 소유권을 되찾았다. [36] 1802년 미국 선박이 뉴올리언스 항구 이용에 문제가 발생하자, 이를 해결해야만 했다. 남부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수송의 대부분을 미시시피 강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퍼슨은 제임스 먼로와 로버트 리빙스턴을 파리로 보내 프랑스와 뉴올리언스 매입에 대하여 협상을 하도록 하였다. 당시 나폴레옹은 아이티에서 반란을 진압하느라 많은 군비를 지출한 상태였고, 영국과의 전쟁을 앞두고 군자금이 필요했다. 나폴레옹은 외무상인 탈레랑을 통해 뉴올리언스 뿐만 아니라 루이지애나 전체에 대한 매입을 제안하였고 협상결과 1, 500만 달러에 매각하였다.
또한 여기에는 빚과 법도 포함되었다. 제퍼슨은 "어느 사회이든 간에 완벽한 헌법이나 법을 만들 수 없다. 지구는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69] 라고 말하였다. 또한 제퍼슨은 법학 혁명의 순환을 계산하였고 "모든 헌법과 모든 법은 19년 뒤에 자연적으로 만료된다. 그리고 법 효력 기간이 그보다 길게 효력되도록 강요받으면 이것은 강압이지, 권리가 아니다"[70] 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계산을 통하여 삶의 자연적 순환 기간이 19년임을 알아내었으며 이 19년의 기간 뒤에는 자신이 믿는 "성숙"[71]의 시대가 온다 생각하였다. [72] 또한 제퍼슨은 국채가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 역설하였다. 그는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전 세대의 빚을 져야 하는 정신적 의무를 부정하였다. 그는 빚을 갚는 것을 보고 "권리에 대한 질문이 아닌 관대함에 대한 질문"이라고 비꼬았다. [73] 제퍼슨은 주의 권한을 지키는 데 앞장을 서서 특히 1798년의 켄터키-버지니아 안에서 연방 정부의 권한이 커지는 것을 크게 우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책 중 일부는 오히려 연방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제퍼슨이 연방주의자들에게 온건한 태도를 취하고 있을 때, 연방주의자들은 당내의 내분에 휩싸여 분열되었다. 아직 민주공화당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지, 연방주의자들은 민주공화당의 정치 선거운동 참여를 거부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민주공화당의 대중적 지지에 매우 놀랐다. 연방주의자들의 정신적 지주인 전임 대통령 애덤스와 존 제이는 공직에서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또다른 지도자인 알렉산더 해밀턴은 1804년에 부통령 에런 버와 결투를 벌였으나 그에게 사살당하여 사실상 연방주의자당을 이끌 마땅한 지도자가 없었다. 미국이 점점 영토를 넓혀가자, [30] 제퍼슨의 반연방 민주주의적 사상이 높은 세금과 강력한 중앙 정부를 지향하던 연방주의자들을 제치고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1805년까지, 연방주의자들은 뉴 잉글랜드 지방과 델라웨어주에서만 강세를 보였고 연방주의자 온건파들은 민주공화당에 가입하였다.
[66] 그러나 제퍼슨은 무정부주의가 귀족, 평민 등 어느 계급에게나 모순적이라고 믿었다. [67] 또한 제퍼슨은 국민들로부터 통치에 대한 찬성을 얻고 미국의 세력 확장을 위하는 미국 정부를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칭송하였다. 독립 선언서의 서문에서 제퍼슨은 이렇게 썼다.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떠한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든지 정부를 변혁 내지 폐지하여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그러한 원칙에 기초를 두고 그러한 형태로 기구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인 것이다. [68] "인민의 동의"를 주창한 제퍼슨은 사람들이 과거 조상들의 행동으로 인하여 정신적으로 나뉠 수 없다고 굳게 믿었다.
미국 대 웨일스 일대일 - AiScore Football LiveSc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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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퍼슨은 모든 사람들이 각각 자신들만의 "절대권"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또한 절대권은 정부 설립 여부와 상관없이 사라지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그 절대권을 줄 수도, 받을 수도, 혹은 뺏을 수도 없다 역설하였다. 절대권은 바로 개인에게 주어진 "자유"의 권한이라고도 설명하였다. 제퍼슨은 절대권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올바른 자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고 스스로 조절하면 아무도 막을 수 없다. 나는 "법의 규제 아래"라고 쓰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법은 폭압자의 뜻이지 우리의 뜻이 아니며, 언제나 우리의 사생활과 인권을 침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61][62] 그리고 제퍼슨은 정부가 자유권을 만들 수 없으며, 이를 위반해선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정당한 자유의 제한은 법에 쓰여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똑같은 자유를 침범하지만 않으면 되는 간단한 것이라고도 말하였다. 제퍼슨은 정부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범하는 사람들을 규제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정부 자체도 개인의 자유는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고도 얘기하였다. 그는 당시 버지니아에서 장자에게만 토지를 상속하는 장자 상속권에게 반기를 들어, 모든 아들들에게 공평히 유산을 분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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